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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거란전쟁 : 고려와 거란 전쟁 이야기, 그리고 강감찬과 귀주대첩

열공하는 라쿤 2023. 11. 12.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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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와 넷플릭스에서 고려거란전쟁을 동시에 방송하여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사극 연기자의 대표인 최수종이 출연하여 더욱 기대를 모으고 있습니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고려과 거란 전쟁의 역사적 배경과 전쟁사를 알아보겠습니다.

■ 목차

1. 고려와 거란 전쟁의 배경과 의미
2. 고려와 거란의 전쟁역사
3. 귀주대첩과 강감찬

고려와 거란 전쟁 배경과 의미

고려와 거란은 지리적으로 인접해 있었습니다.
정치, 경제, 문화 등 여러 분야에서 교류도 활발하게 진행되었습니다.
고려는 건국 당시에는 거란을 적대적으로 대하고 북진 정책을 추진했으나, 송나라와 화친 정책을 실시하면서 거란과의 갈등이 심화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거란은 고려의 송나라와의 교류를 막고, 강동 6주를 되찾으려는 목적으로 고려를 침략했습니다.
고려와 거란은 993년부터 1019년까지 세 번에 걸쳐 전쟁을 벌였으며, 이 전쟁은 고려의 국력과 국위를 높이고, 거란의 남침을 저지하는 데 큰 공헌을 한 역사적 의미가 있습니다.

고려와 거란의 전쟁 역사

고려 거란전쟁은 고려와 요나라 사이에 993년부터 1019년까지 세 번에 걸쳐 벌어진 전쟁입니다. 
이 전쟁은 고려의 북진 정책과 요나라의 남침 정책이 충돌하면서 발생했으며, 고려가 거란의 침략을 격퇴하고 동아시아의 세력 균형을 재정립하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1차 전쟁 : 993년

첫 번째 전쟁은 993년에 요나라의 동경유수 소손녕이 약 80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했습니다.
고려 성종은 국내의 군사력을 총동원하여 거란군을 맞이했으며, 강동 6주를 포기하고 고려의 사대로 들어가는 대신, 거란군을 철수시키는 데 성공했습니다.

2차 전쟁 : 1010~1011년

두 번째 전쟁은 1010년에 요 성종이 강조가 목종을 시해한 죄를 묻는다는 구실로 고려에 직접 침입했습니다.
고려 현종은 거란군의 압박에 견디지 못하고 개경을 탈출했으며, 거란군은 고려의 수도를 점령하고 불태웠습니다.
그러나 고려의 군사들은 거란군의 후방을 공격하고, 거란군의 군량을 방해하면서 저항했습니다.
거란군은 고려의 겨울과 기근에 시달리다가 패하여, 1011년에 철수하게 되었습니다.

3차 전쟁 : 1018~1019년

세 번째 전쟁은 1018년에 요나라의 서경유수 소배압이 20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고려에 침입했습니다. 고려 현종은 거란군의 진군을 저지하기 위해 강감찬을 군사에 임명했으며, 강감찬은 거란군의 행군을 방해하고, 귀주에서 거란군을 매복하여 대파했습니다. 거란군은 3만 명의 포로를 끌고 도주하려 했으나, 고려의 양규가 이들을 추격하여 모두 해방시켰습니다. 거란군은 208,000명 중에서 단 2,700명만이 생존하여 돌아갔습니다. 

천리장성과 강동6주

고려와 거란 전쟁의 역사적 의미

고려 거란전쟁은 고려의 국력과 국위를 높이고, 거란의 남침을 저지하는 데 큰 공헌을 했습니다. 고려와 요나라는 전쟁 후에 사신을 왕래하면서 국교를 회복했으며, 고려는 요나라의 연호를 사용하는 대신, 요나라가 요구한 국왕의 친조와 강동 6주를 반환하지 않았습니다. 요나라는 고려 침략에 실패하여 요동에서의 지배권이 흔들리기 시작했고, 고려가 있는 한 송나라를 쳐들어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고려-송나라-요나라 3국의 대등한 세력 균형이 형성되었습니다.

넷플릭스 : 고려거란전쟁

귀주대첩과 강감찬

귀주대첩은 고려와 요나라 사이에 1019년에 벌어진 전투로, 고려의 강감찬 장군이 거란의 소배압 장군을 이끈 10만 명의 대군을 귀주에서 크게 무찔러 고려의 승리로 끝난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이 전투는 거란의 고려 침략 의지를 꺾고, 고려-송나라-요나라 3국의 대등한 세력 균형을 형성하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강감찬 장군은?

강감찬 장군은 고려시대 전기의 문신이자 군사 지휘관으로, 고려-거란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인물입니다. 
강감찬은 948년에 금주에서 태어나 983년에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했습니다. 
그는 내정과 외교 분야에서 활약했으며, 거란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군사 전략을 고민했습니다. 
1010년에 거란의 제2차 침입이 일어나자, 강감찬은 항복을 건의하는 다른 신하들에 반대하고 응전할 계책을 제시했습니다. 
1018년에 거란의 제3차 침입이 일어나자, 강감찬은 상원수대장군으로서 20만 8천 명의 고려군을 이끌고 거란군을 여러 전투에서 격파했습니다. 
특히 귀주대첩에서는 거란군 10만 명 중에서 단 2,700명만이 생존하여 돌아가게 만들었습니다. 
이 전투는 거란의 고려 침략 의지를 꺾고, 고려-송나라-요나라 3국의 대등한 세력 균형을 형성하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강감찬은 전쟁 이후에도 국방 문제에 꾸준히 관심을 갖고, 1030년에 문하시중에 올랐으나, 1031년에 사망했습니다. 
강감찬 장군은 고려의 국력과 국위를 높이고, 우리 민족의 위대함을 보여준 역사적인 영웅입니다.

귀주대첩은?

귀주대첩은 고려와 거란 사이에 1019년에 벌어진 전투입니다.
고려의 강감찬 장군이 거란의 소배압 장군을 이끈 10만 명의 대군을 귀주에서 크게 무찔러 고려의 승리로 끝난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이 전투는 거란의 고려 침략 의지를 꺾고, 고려-송나라-요나라 3국의 대등한 세력 균형을 형성하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귀주대첩의 배경

1018년에 거란의 서경유수 소배압이 20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고려에 침입했습니다.
고려 현종은 거란군의 진군을 저지하기 위해 강감찬을 군사에 임명했으며, 강감찬은 거란군의 행군을 방해하고, 여러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거란군은 고려의 수도 개경을 향해 진격했으며, 고려군은 개경을 방어하기 위해 귀주로 후퇴했습니다.

 

 

귀주대첩

고려시대 현종 때 거란 침략군을 귀주에서 물리쳐 승리한 싸움. 고려는 태조 때부터 발해를 멸망시키고 압력을 가해오는 거란에 대해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북진정책을 계속 시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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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군과 귀주에서의 전투

1019년 1월 10일, 거란군은 귀주에 도착했으며, 고려군은 귀주성을 포위하고 있는 거란군의 약점을 파악했습니다.
강감찬은 거란군의 전열을 뚫고, 거란군의 후방을 공격하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강감찬은 5,000명의 기병을 이끌고, 거란군의 중앙을 돌파했으며, 거란군의 사령관 소배압을 죽였습니다.
거란군은 사령관을 잃고, 고려군의 기습에 당황하여 패닉에 빠졌습니다.
고려군은 거란군을 쫓아가며 살육했으며, 거란군은 10만 명 중에서 단 2,700명만이 생존하여 돌아갔습니다.

귀주대첩 결과

귀주대첩으로 고려는 거란의 침략을 완전히 격퇴하고, 고려의 국력과 국위를 높였습니다.
거란은 고려의 겨울과 기근에 시달리다가, 1020년에 고려와 평화 조약을 체결했습니다.
고려와 거란의 요나라는 전쟁 후에 사신을 왕래하면서 국교를 회복했으며, 고려는 요나라의 연호를 사용하는 대신, 요나라가 요구한 국왕의 친조와 강동 6주를 반환하지 않았습니다.
요나라는 고려 침략에 실패하여 요동에서의 지배권이 흔들리기 시작했고, 고려가 있는 한 송나라를 쳐들어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고려-송나라-요나라 3국의 대등한 세력 균형이 형성되었습니다.

귀주대첩은 고려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전투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으며, 강감찬 장군은 우리 민족의 영웅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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